
《Enchanted Land》
20 May 2026 – 31 May 2026
Unbound, Seoul
Installation Views





Exhibition Text
아포칼립스(apocalypse)는 세상의 종말 혹은 파멸을 뜻한다. 이 단어는 ‘베일을 벗기다’, ‘숨겨진 것을 드러내다’라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에서 기원했다. 아포칼립스가 감춰져 있던 세계의 구조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가깝다면, 주지 수의 작업은 바로 이 ‘드러냄’의 행위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즉 인류 멸종 이후의 풍경을 그려왔다.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베일을 한꺼풀 벗겨내, 그 자리에 살아 숨쉬던 생명과 물질의 관계를 포착한다. 미생물부터 폐건축물, 문명의 흔적만 남은 도시, 낯설게 변형 된 자연 등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있는(을) 모든 요소가 작업의 소재다. 오늘날 빙하가 녹 고 바다가 끓는 전례 없는 기후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멸종’이라는 화두가 그리 드문 것은 아니지만, 주지수에게 인류의 부재는 인간 활동이 초래한 새로운 풍경을 열어젖히는 조건이 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어린 시절의 성장 환경이 깃들어 있다. 해양과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과 미국 시골 마을에서 경험한 자연 친화적 삶은 작가가 탈인간중심주의적 사고 를 지니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학창 시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어느 쪽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정체성으로 살아온 그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타자와 주변을 예민하 게 감지하는 태도를 체득했다. 이러한 관찰자적 시선이 그림에도 고스란히 스며있다. 작가는 도래할 미래를 파괴적이고 공포스러운 이미지로 제시하는 대신, 가치 판단을 유보한 채 사진 찍듯 장면을 화폭에 담아낸다.
주지수는 이 장면이 “기이하고도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그 이질적 감정의 기저에는 사라진 인류를 뒤로하고 살아남은 비인간 존재에 대한 경이와, 멸종을 전제한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시대적 불안이 교차하리라. 그가 묘사하는 장면이 ‘아름다운’ 이유는 포스트-아포칼립스라는 맥락을 알기 전까지는 그것이 평범한 풍경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령
동굴 풍경을 그린
고 역설 했듯, 동굴 속에서 반복되는 생명의 사이클은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홀로 존속할 수 없다는 현실의 자각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최근 뜨개로 만든 태피스트리작업을 새롭게 시도했다. 빈티지 액자에 작은 텍스타일을 결합한
회화의 공간적 확장 가능성을 감지한 작가는 <비정형적 문양들>(2026)에서 태피스트리작업 을 본격화했다. 전시장 한쪽벽에길게늘어뜨린이작품은회화의붓질을씨실과날실의직조구조로전환해작가의세계관을보다물질적으로 탐구했다. 각양각색의 실이 일정한 패턴 없이 서로 얽히고 침투하는 화면은 인류 멸종 이후의 풍경을 응축한 ‘진액’이다. 인간의 병폐 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알록달록하게 물든 지구에서 색상만 추출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작가에 따르면 빠른 붓질로 그려진 회화가 문명 해체의 속도를 포착하는 시도였던 반면, 한 땀 한 땀 수놓은 태피스트리는 축적과 반복으로 형성된 또 다른 세계다. 그렇다면 이 작품 앞으로 놓인 작은 조각
주지수의 작업은 인류 멸종 이후의 세계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으로 재구성한다. 회화 는 인간 문명이 정지한 후에도 어김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태피스트리는 그 시간을 토대로 새 롭게 형성된 공간을 드러낸다. 결국 작가에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종말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필터를 벗긴 ‘현재’다. 나는 그 안에서 우리가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얼굴을 상상해 본다. / 최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