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평론글

주지수의 초기 회화: 인공 사랑, 거짓 노스탤지어, 비밀 마법

조주리2026

주지수 회화의 정조는 더없이 쓸쓸하다. 무엇인가로 가득 들어찬 화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생동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거대한 재난이나 사건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변두리 건물의 잔해, 녹슨 선박의 몸체, 갸날프게 나부끼는 유기물의 흔적뿐이다. 그러나 폐허에 가까운 이 세계의 풍경이 한없이 불행하거나 처절하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어째서일까. 스러져가는 세계의 모습에서 오히려 고요함을 감지하게 되는 것은 온갖 불행한 일들의 진동이 이미 멎었다는 예감, 한 세계의 파멸 이후 기나긴 잠복기가 시작되었다는 안도감, 그리고 거대한 종말 앞에서는 인간사의 고독과 우울조차 한낱 먼지 같은 사소한 일로 느껴지게 하는 상대적 위안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를 만나기 위해 여러 차례 교통편을 갈아타고 울산의 북부지대를 향하는 동안, 시야에 들어온 것은 노화 중인 도시의 서늘한 풍경과 사람의 기척이 증발한 듯한 한낮의 거리, 그리고 ‘인공지능 수도’라는 생경한 행정의 표식들이었다. 바다 내음도, 한여름의 짙은 신록도, 노동하는 이들의 몸도 좀처럼 마주할 수 없었던 짧은 여정 속에서, 무엇이 작가를 이곳으로 이끌었을지 자연스레 헤아려 보게 되었다. 낯선 곳에서 온전한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작가들에게 생경한 도시의 풍광과 지역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게 하는 하나의 자극제가 되곤 한다. 그럼에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심스러운 상상을 보태자면, 작가는 이 낯선 도시에서 역설적으로 어떤 종류의 '노스탤지어'를 길어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가 구하는 것은 과거에 실재했던 기억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장소를 향한 선명한 그리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건에 투영된 상상의 정서, 미래를 향해 던져진 기억 이전의 향수와 같은 복합적인 감정에 가까울 것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라 정체성의 바탕을 형성한 뒤 한국으로 건너와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작업을 이어온 주지수의 삶의 궤적은, 그 자체로 특이한 서사라기보다 고향과 이국,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다층적인 기억과 감각을 몸에 새겨온 과정이었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아시아계로 살아가며 경험한 문화적 이질감과, 한국의 낯선 환경 속에서 다시금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인식하게 된 과정은 서로 겹쳐지며 작가의 사회문화적 감각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른바 입시미술을 거쳐 제도권 미술교육으로 진입하고 동양화를 수학하게 된 과정 또한 한국 사회의 특수한 감각을 압축적으로 내면화하는 시간이었으리라.
그러나 이처럼 서로 다른 기억과 감각이 맞부딪히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 긴장 자체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회화적 언어로 변환된 것은 아닐까.
현재 주지수의 회화세계는 큰 틀에서 기후위기와 인류세를 둘러싼 비관적 정서, 그리고 생명정치와 생태 연구를 가로지르는 문제의식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학원 시기를 거치며 화면의 구도와 기법을 지속적으로 실험해 왔고, 지금은 작가로서 변별될 수 있는 회화 언어와 고유한 서사를 모색해 가고 있다. 근작들로부터 해양과학자인 아버지의 영향 아래 해양 풍경과 생태계가 그의 화면에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회화를 이러한 몇 가지 전기적 단서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한 사람의 세계가 결코 몇 가지 경험과 배경으로 온전히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작업은 아직 스스로도 언어화하지 못한 의식의 공백과 서사로 정착되지 않은 기억과 감각의 층위에서 비로소 고유한 가능성을 드러낸다. 오늘날 작가 스스로가 작업을 만들어 나가는 일은 바로 그 미완의 영역을 더듬어 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낯선 도시를 향한 그의 이주와 방랑 역시 새로운 풍경을 수집하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감각과 기억을 마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최근의 전시 《Enchanted Land》(2026, 서울: 언바운드)는 그간의 작업을 하나의 언어로 틀짓는 동시에, 이미지를 지탱할 개념적 토대를 모색한 시도로 읽힌다. 인류 멸종 이후의 풍경을 수식하는 말로 Enchanted, 즉 '매혹된' 혹은 '마법에 사로잡힌'이라는 표현을 선택한 것은 다소 의외이면서도, 적요한 공간을 향한 작가의 시선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다. 통상 폐허와 종말은 상실과 절망의 언어로 읽히기 마련이지만, 주지수에게 그것은 동시에 순환과 재생이 시작되는 시간이며,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된 세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사람이 사라진 풍경은 단순한 붕괴의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질서와 서사가 지워진 이후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풍경은 하나의 '타뷸라 라사(tabula rasa)'에 가깝다. 모든 것이 소거된 빈 석판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과 생명이 다시 새겨질 수 있는 잠재성의 표면인 것이다.
낯선 공간을 조금씩 익숙한 공간으로 바꾸어 가는 동안, 주지수가 틈틈이 그려오고 만들어온 것들 - 크고 작은 평면 회화와 조각 오브제, 손으로 직조한 패브릭- 은 그가 감각한 세계를 추상화한 표상인 동시에, 붓에 물감을 적셔 장지를 두드리고 오브제를 접합하며

실을 엮어 직조하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 안의 불안과 허무를 돌보고 봉합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과격한 상상이 아니기를 바라며, 나는 주지수의 세계에 오늘을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의 젊은 자화상을 겹쳐 본다. 매사에 지나치게 열심이면서도 끝내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하고, 금세 차오른 확신마저 다른 형식으로 바꾸어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 그것은 하나의 열병이자, 어쩌면 마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시간은 하룻밤 사이 우주만큼 멀리 선회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의 피부 가까이로 급속히 수축하기도 한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삶의 직접적인 시간 감각 속에서 이해하기보다 우주적 스케일로 확장해 바라보고, 다시 그것을 극도로 미세한 감각의 단위로 환원하는 태도는 동시대 감수성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주지수의 화면은 바로 그러한 시간 감각과 정서를 고요히 붙잡아 둔다.
빠르게 추격해 오는 나날 속에서 주지수가 그리워하는 것이 꼭 평온했던 유년만은 아닐 것이고,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내일의 멸망만도 아닐 것이다. 사랑과 미움 같은 세속의 감정, 끝내 원인을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과 불안, 그리고 무엇보다 한없이 투명하게 몰두하고자 하는 예술적 열망. 그의 회화를 움직이는 것은 사랑과 불안, 열망과 허무가 서로를 밀고 당기며 끝내 하나의 이미지로 응결되는 힘일 것이다.
작업에 등장하는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태고의 시간, 자연을 닮았으나 끝내 인위적인 풍경,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비(非)-역사적 순간은 시간에서 비켜나고 장소로부터 이탈한, 어긋나고 이지러진 감각이 빚어낸 결과다. 이를 주지수의 ‘초기 회화’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아직 완결되지 않은 하나의 세계가 움트고 있다. 그 세계를 이루는 인공 사랑과 거짓 노스탤지어, 그리고 비밀 마법이 앞으로 어떻게 변주되고 스스로를 전복해 갈지, 그 다음 시간을 조용히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