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풍경
주지수는 풍경을 그린다. 말하자면, 그것은 풍경 중에서도 도시 풍경화이고, 현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닌 과거 혹은 미래 시제를 형상화하는 풍경화다.
주지수의 풍경을 들여다보기 전에, 유구한 풍경화의 전통을 잠시 상기해 보자. 으레 풍경화의 안쪽은 인 간의 욕망이 깃드는 이상적 공간으로 상정되었다. 그 공간은 속세의 각종 시름을 떠나 귀의할 자연이 되기도 하고, 초월적 정신이 맴도는 신선놀음의 세상이 되기도 하며, 아름다움의 이상이 완벽히 구현된 규범적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역사적 순간에, 풍경화에 근대적 도시가 등장했다. 산업화와 함께 등장한 도시는 팽창을 거듭하며 현대의 화가들 앞에 나타났고, 화가들은 그 새로운 공간을 화폭에 담으며 또 다른 종류의 욕망을 투사하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텅 빈 도시의 모습, 속도, 소음, 대중의 냄 새와 열기가 붐비던 일상을 비워내고 그 흔적이 어렴풋하게 남은 문명의 단편이 수많은 캔버스와 사진 에 담겼다. 그렇게 그려진 도시 풍경화는 새로운 종류의 장르적 풍속을 낳았다. 풍경화는 더 이상 과거 의 전통적 풍경화와 같이 탈속/피안을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현재를 달리 보게 하는 가공의 장면을 보여주었다.
요컨대, 풍경이란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주지수의 도시 풍경도 지금 이곳의 현 실이 아닌 다른 곳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주지수가 그리는 풍경 속 공간은 어디인가? 그것은 폐허의 모 습을 하고 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없다. 작가가 자기 그림의 대상이 되는 공간을 픽션적으로 설정해 둔 탓에 이러한 정황은 더욱 강조된다. 그는 인류가 멸종한 이후, 인간 문명이 잔흔으로만 남은 시공을 배 경 삼아, 폐허로 남았거나 폐허로 남게 될 도시, 비-인류의 공간을 펼쳐 보인다. 으레 풍경화 장르가 보여주는 이상화의 의지는 결여되어 있지만, 픽션이 작동하는 화면 속 장소는 일상의 재현으로부터 거 리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여느 풍경화의 가상성을 공유한다.
그런 한편, 주지수의 그림에 등장하는 공간들은 완전히 생경한 모습은 아닌데, 그와 같은 폐허의 장면이 종종 현실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외곽의 버려진 공장 지대, 더 이상 유입 인구가 없는 늙은 농촌, 신 자도 신도 없이 버려진 종교적 형상 등은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폐허의 장면 이 여기저기서 반복되고 있다. 작가가 도시 문명의 미래 시제, 즉 인류의 멸망 이후라는 가상적 시간을 설정하고 있지만, 그가 도입한 시점은 이미 도래한 폐허, 즉 과거에서 건져 올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는 익숙한 도시 풍경의 감각을 압축해 다르게 보여줄 뿐이다. 덧칠 없이 한 번의 엷은 붓길들을 나란 히 세우면서 빠른 속도로 채운 화면은, 인류의 멸망 ‘이후’라는 가상적 세팅을 가까운 미래로 앞당기 는 듯하다.
주지수의 그림은 주어진 공간을 가상적으로 재구성하여 보는 이와 그리는 이의 욕망이 투사되도록 만드 는 풍경화의 오래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의 풍경화를 그리는 작가는 소위 ‘인류세’라고 하는 자 장의 바깥을 상상하며 공간을
재발견한다. 섣불리 비관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정해진 태도나 판단도 없 이 그는, 더 이상의 인간 활동이 멈추게 되는 상황을 구상하며 무분별한 생산(개발)도 소비도 없는 정지 된 문명을 풍경화로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