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작가노트

결국, 온기(After All, Warmth)

주지수2026

1. 모래 운동장과 이방인
어느 한적한 미국 시골 마을, 거대한 노란 스쿨버스와 패스트푸드, 추수감사절의 냄새로 기억되는 어린 시절은 낡은 필름처럼 뭉클하고 선명하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온 후 마주한 한국은 좁은 땅 위로 빼곡한 아파트가 솟아 있고, 숨 막히는 학구열 속에서 끝없이 학원을 맴돌아야 했던 낯선 세계였다. 잔디 대신 모래 먼지가 흩날리는 삭막한 운동장의 풍경은 어린 나에게 이질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 90년대의 과도기를 지나 스마트폰과 SNS의 시대로 넘어오는 동안, 나는 사람들 틈에서 튀지 않기 위해 평범함을 연기했다. 두 개의 문화와 시공간 사이에서 나의 정체성은 늘 흔들림 속에 있었다. 나는 결국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지나간 편안함을 끝없이 갈망하며 주변을 서성이는 '이방인'이 되었다.

2. 찰랑거리는 감정의 출력
불안은 강박처럼 목을 조여왔지만, 어느 순간 나를 가두고 있던 방어 기제와 보호막이 터졌다. 요란한 파국일 줄 알았으나, 온몸으로 자극을 느끼며 살아갈 만해졌다. 깊게 숨을 들이켜고 흩어지는 찰나의 파편들을 다급하게 잡아 붙든다. 가파르게 숨을 몰아쉬며 기를 모은다. 끓는점에 다다르기 직전, 99도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내면에서 울렁이고 찰랑거리는 감정들을 화면 위로 뱉어낸다. 무의식이 인식보다 빠르듯, 계획 없이 붓질을 하고 물감을 쌓아 올린다. 숨 쉬는 것이 당연해 무감각해졌던 몸의 촉감과 온도가, 땀방울이 맺히는 이 물리적인 노동의 행위 속에서 비로소 펄떡이며 되살아난다.

3. 플라스틱 화석과 낯선 생명체, 결국 남은 온기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인간 중심의 서사가 지워진,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제3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다. 외계인이나 자연, 혹은 세균일지도 모르는 이 무명(無名)의 시선 속에서 인공물과 자연물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진다. 멸망이 휩쓸고 간 숲의 잔해 속에서 우리는 과거 공룡의 화석을 발굴하듯, 흙 속에 묻힌 레고 조각과 플라스틱 쓰레기를 자연스럽게 발견한다. 보이지 않는 곰팡이와 포자들이 온난화로 달궈진 멸종의 풍경을 덮고, 그 위로 낯선 생명체들이 꿈틀꿈틀 자라나며 기이한 군집을 이룬다. 내일의 모습은 아득하고 흐릿하지만, 이 결말이 완전한 마침표는 아니다. 나의 작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구와 동화되어 가는 이 아름다운 멸망 이후를 기록하는 일이다. 파괴된 것들 위로 피어난 생명력은 다시 한번 나를 가장 자유로운 곳으로 이끈다. 요란한 멸망과 서성임이 끝난 뒤, 미지의 다음 챕터를 앞둔 빈자리에는 기어코 따스한 온기가 남는다.